금융화 (financialization)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은 제조업이 '금융업화' 해가는 시점이다.
한국의 '산업화'또한 도시빈민의 양산, 재벌자본의 축적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국민의 힘으로 성장했고, 그 대가를 노동계층이 받음으로써 사회전체적인 수요가 창출될 수 있었다.(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GDP지표가 GNP지표보다 중요시 여겨지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재벌들의 주장처럼 '한국의 기업'으로서 빼먹고 해먹은 만큼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삶에 기여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금융화'는 경영합리성, 효율성 등의 기업 내부적인 목적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기업의 기반을 이루는 공동체를 외면하고 있다. 산업자본의 금융화는 '손을 더럽히는'제조업 노동자들을 유연하게 사용함으로써, '쿨한'금융거래의 비중을 높일 것이다. 주주민주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부치면 돈을 가진자들이 노동하는 자들의 삶을 결정하는 '금권정치'형 기업구조를 만들게 될 것이다. 금산분리 원칙완화는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도덕적해이'보다도 금융업을 위해 제조업을 버리는 - GE의 잭웰치가 그랬듯이 - '도덕성상실'을 더욱 우려케한다.

현대판 '자유주의'는 대공황당시 몰락했던 금융자산가들이 다시 경제발전을 위해 들고나온 이념이다. 그들의 자유관이 여기에 들어있다. 유연화, 통합화, 신속화... 연방주의자들이 공화주의자들을 누르고 미국 전역에 중앙은행을 세운 것과 같은 이해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제 그들은 세계를 상대로 그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자유'는 공동체의 의미를 탈색시킬 것이다. 대공황 이후 미국이 그래왔듯. 프랑스혁명기의 자유가 '상업 부르주아지'들의 것이었다면, 현재의 자유는 '금융자본가'들의 것이다. 시예예스는 '제3계급'이 '전부'라고 얘기했지만, 오늘날에는 누가 '공동체'가 전부하고 이야기할 것인가. 맑스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던 산업자본가 계층은 대공황 이후로 전세계를 지배했다. 이때 무너졌던 금융자본가 계층은 80년대 킹스턴체제를 배경으로 영국 보수당, 미국 공화당의 자유주의 세력으로 다시 등장하여 자본주의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이것은 '미국'의 이야기라는 것. 우리나라의 주류세력은 미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 미국적인 발전만이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 이다. 시예예스와 맑스의 숨결은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 세력의 모습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 정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앞으로 우리세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모든 국가들이 미국처럼 대응하지 않았다. 파시즘으로 퇴보한 나라도 있었지만 북유럽의 국가들은 기업과 노동자간의 타협을 이루어냈다. 미국은 국가주도의, 특히 정부구입 항목 증대(아주 좋게 말해서)에 힘을 쏟았다. 이것은 분명 문제에 대응하는 근본적인 이념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이념을 지향할 필연이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2008. 3. 20. 12:17

어톤먼트 (Atonement, 조 라이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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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해석.

언니의 사랑을 질투한 동생이 언니의 연인을 모함하여 둘을 갈라 놓는다. 2차대전에 참전한 이후 두번다시 만나지 못하는 언니와 그의 연인에 대해 참회와 속죄의 마음으로, 동생은 소설을 쓴다. 영화는 질투와 전쟁이 갈라놓은 비극적이고 애틋한 사랑을 묘사한다.

두 번째 해석.

영화가 전체적으로 로맨틱하거나 사랑의 감정을 부각시키기 보다 과격한 감정표현과 노출을 묘사하는 느낌이다. 이것은 제 3자가 자매의 사랑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한 인물의 머리 속에서 구상된 현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물(water) - 물은 동생의 사랑이 거부당하는 장소이자, 언니와 연인의 사랑을 엿보는 장소이자, 언니가 죽음을 맞는 장소이다. 동생은 물의 체험(첫 경험을 은유하기도 한다)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거절당하고 그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된다. 물에서 혼자 힘으로 걸어나오는 '당당한'여성인 언니는 동생이 이루지 못한 육체적 사랑을 암시하는 인물이다.

동생은 언니를 '만들어' 내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꿈꾸고 '엿보게 되지만' 결국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그를 모함하여 범죄자로 만든다. 하지만 그가 전쟁에 징용되었다는 말을 듣고 간호사가 된다. 동생의 소설 속에서 언니 역시 간호사가 된다. 그것도 같은 '가명'을 사용하는. 여기서 영화는 의도적으로 자매가 하나의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자신인 언니는 연인과 이별하고, 재회하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키스하고, 자신을 비난한다.

물론 그것은 영화 마지막에서 동생이 밝히듯, 자신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낸 장면들이다. 하지만 그 참회는 언니와 그 연인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자신의 증오심이 사랑하는 이를 불행에 빠트리게된 데 대한 참회이다. 연인은 죽지만, 자신은 소설 속에서 언니를 통해 그와 사랑을 이루어 낸다. 언니는 처음 등장했듯이 물 속으로 돌아가 소멸한다. 소설의 마지막이다.

두번째로 과도한 표현- 이것은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렇다. 동생이 봤다는 그 편지에 씌어진 내용, 서재에서 목격한 장면,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격렬한 비난, 자신 앞에서 보여지는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애정표현들.. 마치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것은 첫번째 해석이 말하는 애틋한 사랑을 묘사한다고 보기에는 과도하고 노골적인 면이 있다. 복수에 가까운 느낌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는 거절했고, 그 여자는 그를 불행에 빠뜨리고 평생을 그를 위한 소설 한 편을 썼다. '어톤먼트.'


2008. 3. 20. 12:10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해롤드 래미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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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마지막인듯이 사랑하고
마지막이 영원할 듯이 진실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사랑은 언제나 하루짜리(one night stand).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로 나타났고 하루가 지나면 식어버리는 사랑처럼 그의 일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처음엔 자신의 기호에 맞는 하루짜리 인생을 즐기지만 진실된 사랑 앞에서 삶에 회의를 느낀다. 여주인공의 비위를 맞춰 하루짜리 사랑을 '완성'시켜보려던 그는 진실이 결여되었음을 알지 못한채 수십번을 실패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정말로 '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 만나는 그대'인데.
이 영화의 터닝포인트는 남자주인공이 진실함에 감동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문제에 사심(私心)없는 관심을 가져주는 여주인공의 태도에서 영원할 듯한 감정을 느낀 그는 사랑과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게 된다. 그 후 반복되는 하루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삶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로 살게되고, 결국 그는 여주인공을 '감동'시켜 진실된 사랑을 얻게 된다.

처음 그에게 내일은 없었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닌 어제와 다른 하루로써의 내일, 어제보다 나은 하루로써의 내일이 없었다. 사랑에 있어서도, 삶에 있어서도. 그가 사랑의 내일을 얻는 순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내일이 찾아오게 된다.

'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만나는 그대를
생애 오직 한번만 만나도 다 만나는 그대를'
(도종환 시 '희망'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