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처럼 소액대출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어떨까.
가난한 사람들은 그저 먹고 살 돈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정치나 이념은 술에 취해 화풀이 할 대상이거나 예전에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을 만한 지나간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들을 폄하하려는게 아니다.)
언제나 있어왔다. 어느 국가에나. 정치투쟁, 민족독립을 이끄는 소수의 지식인들과 그것을 따르는 열성분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하층민중들. 그들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일까.
지겨운 가난의 반복. 빠지기 쉬운 유혹의 손길. 그렇다. 바로 그 손길이야말로 가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공포다. 먹고 살 돈. 요즘은 의식주(衣食住)가 아니라 의교주(醫敎住)라고 한다. 2MB 아저씨 때문에 더욱 절실해진 의료와 교육의 공공성 때문이다. 어쩌면 먹고 입는게 큰 문제가 아닌 사회가 되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조금 덜 먹고 꾸밈없이 살면 되니까.
하지만 여전히 남는 건 '주거'의 문제다. 서민들의 집세 문제. 이것은 유혹에 빠지는 대표적인 원인이다. 나의 주변에도 있다. 이들은 유혹에 빠지거나 친척의 도움을 받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정말이다. 유혹은 '낮은 이자'를 친척은 '무이자'를 요구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일반은행은 이들에게 높은 이자 - 이것이 서브프라임모기지론과 같은 high risk, high return의 성격을 갖는 금융상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를 제공하거나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장사하는 은행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안그래도 요즘 자본시장통합법으로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는데.. 정신나가지 않고서야 빈민을 대상으로 대출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친척들은 무슨 잘못인가. 피해가 넓게 퍼질 뿐이다. 경제학적으로 본다면 이중의 세금을 내는 셈이다. 그것도 국가가 방만한 사회복지를 위해. 정치가들은 무슨 권리로 이렇게 '돌려막는'것을 허용받았는지 궁금하다. 아직까지 한국의 '지식인'들은 개발에 익숙하고 그로부터 덕을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지식인이 아닐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1년 평균납세액에도 못미치는 돈을 내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정치를 하겠다니.. 만용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해줄 수 있는 건 유혹 뿐인가. 비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더라도 당장 돈을 제공해주니까. 아니다. 이건 누가봐도 아니라는 걸 안다. 없는 사람들 등쳐먹는 사기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없는 사람들은 등쳐먹을 수 없다. 워낙 가진게 없으므로. 그러면 누가 손해를 보는가. 결국 사기꾼들에게 속는 금융기관들이고, 그들을 잡기위해 경찰비용을 소모해야하는 국가다. 직접적으로는 은행이 제일 손해본다. 국가가 나서서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긴 하지만.
역시 결론은 유누스 총재같은 똑똑한 부자 혹은 우리의 세금이다. 소액대출은행. 자선사업은 아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혈맥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시장의 폭력으로 부터 빈자를 지키고 자활을 견인하는 디딤돌'로서. 그리고 세금. 우리나라에도 지식인들이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갔으면 한다. 그들이 세금을 '효율적으로' 집행해주었으면 한다. 국민에게 이중의 부담을 지우지 말고. 아마도 그것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부쿠레슈티의 동쪽: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12:08 East Of Bucharest : A Fost Sau N-A Fost?,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2006)

그날 혁명이 있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날 눈이 내렸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평화롭게. 기분좋은 날이었다.
방송사 사장 '비질 지데레스쿠'씨는 언론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런 물음을 통해 과거를 재조명하고 '재구성'하게 된다.
승자의 역사는 그렇게 여과되어 기록으로 남는다.
2MB 아저씨는 치졸한 금융사기범, 탈세범에서 인간승리의 상징으로 재인식되었다.
이 때 뇌리에 확 떠오르는 소설이 있었으니, 바로 조지 오웰의 '1984'다.
'이중사고'.
아주 무서운 기억의 조작이다.
우선 과거와 반대되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 다음 원래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지우게 한다.
그러면 새로 만들어진 유일한 '진실'만이 남는 것이다.
그게 어떻든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대한' 이야기일 뿐더러, 새로운 진실은 국가의 정의에 봉사하기까지 한다.
나라를 위해, '빅브라더'를 위해.
혁명이 우리 마을에 있어 과연 중요한 것이었는가.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질씨는 -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간에 - 체제의 옹호자로서 그 '획기적인' 역사의 순간이 우리 도시에도 있었는지를 주제로 설정한다. 1979년 12월 17일 '티미소아라'에서 시작해 22일 '부쿠레슈티'에서 독재자 '차우체스쿠'를 쫓아냄으로써 완성된 민중의 혁명. 그 영광스런 혁명의 기억을 우리도 간직하고 잇는지 그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을 밝혀줄 사람은 당연히 '지식인'들이다. 일상의 경험이 아닌 '거대한' 의미를 부여해 줄 지식인. 그래서 그 마을의 '선생님'들이 초청된다.
하지만 토크쇼가 결론없이 끝날 순 없었다. 이제 문제설정은 '12시 8분 이전에 광장에 도착했는지 이후에 도착했는지'가 된다. 이건 중요하다. 마네스쿠씨 같은 지식인이, 차우체스쿠가 '헬기'를 타고 쫓겨가기 전에 광장에 도착했다면 우리 마을에 혁명은 있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기 때문에. 혁명 당시의 방직공이었던 비질씨는 몰랐어도, 지금 방송사 사장인 비질씨는 아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언론조작은 실패한다. 마을사람들은 순진하지만 정체가 드러난 저 '위선자'들이 하는 얘기가 사실이 아님을 안다. 진실은 대체되지 않고 은폐되지도 않는다. 진실은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피스쿠치씨가 털어놓는 기분좋았던 하루. 그것이 그 날의 기억이다.
혁명보다는 아내의 웃음이 더 기억에 남았고, 차우체스쿠가 약속햇던 100Lei를 못받게 되어 약간은 실망했다는 정도의 기억. 공산주의는 나쁜 것이기에 사람들과 함께 광장에 몰려 나갔었던 기억. 피스쿠치씨 말대로 혁명은 '전등'과도 같은 의미로 남아있다. 중심지역에서부터 어두운 곳으로 구석구석 밝혀져 나가는. 이 부쿠레슈티의 동쪽 마을에는 늘 반복되는 그런 일상적인 의미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떤 여성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12월 23일에도 부쿠레슈티에서 혁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 아들은 그 현장에서 죽었다.
자, 이제 그런 슬픈 얘기는 그만하자. 밖에는 그때처럼 눈이 내린다.
그때가 어땠든 살아있는 우리는 눈을 즐기러 밖에 나가자.
어설픈 토크쇼는 '메리크리스마스'로 어영부영 끝을 맺는다.
밴드 비지트(The Band's Visit, Bikur Ha-Tizmoret, 에란 콜리린, 2007)

조용한 악단만큼이나 '벳 하띠끄바' 마을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을 고려한다면 더욱 평화롭게 느껴진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기억...
그 옛날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도착한 곳이 BC14세기의 '가나안'땅이며 곧 지금의 이스라엘지역이다. A.D 6세기에 저작된 마호멧의 '코란'을 보면 '아브라함'과 '솔로몬', '예수'등은 아랍민족과 조상을 공유하는 동족 예언자로 등장한다. 이것을 두고 마호멧이 유대교경전을 보고 '짜집기'했다는 말이 있지만, 유대민족과 아랍민족이 관계없다는 주장까지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집트인 모세는 유대백성들을 이끌고 시나이 반도를 둘러 모압평지를 유랑하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한다. 그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을 정복(BC.1000년경)하기 까지 투쟁이 있었고 100년도 지나지 않아 '북조이스라엘'과 '남조유다'로 갈라진다. 바빌론왕국, 페르시아제국, 로마제국, 몽골제국, 오스만제국 등 초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으며 유대인들은 땅을 잃어버리는 것이 근대까지의 역사다.
그토록 시달린 유대민족은 1차대전 이후 영국에게 '시온'을 약속받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며 '독립'을 선포한다. 이걸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기에 아랍국가들이 반대해서 충돌한 것이 소위 '중동전쟁'이다. 4차에 걸친 전쟁 동안 이스라엘과 가장 치열하게 이해관계가 대립한 나라를 꼽으라면 이집트와 시리아다. 특히 이집트는 '시나이반도'와 '수에즈운하'의 영유권을 두고 이스라엘 뒤에 숨어있는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초강대국들과도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한다.
서론이 길었다. 영화는 이런 아픈 기억을 공유하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현재'를 비춘다. 이스라엘의 '페타 띠끄바'에 있는 아랍문화센터에서 공연을 하기로한 알렉산드리아 경찰 교향악단. (줄여서 악단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이해를 돕기위해 다음 지도를 보자.
파란색 선은 모세의 '출애굽'경로다. 이건 비교를 위해서 넣어뒀는데, 순수하게 '헤멘'걸로 따지면 모세가 훨씬 더 헤멨다. (경건한 기독교 분들께는 죄송..) 그러고 보면 얼추 경로도 비슷한 데가 있다. 악단의 착오는 하느님의 '계획'에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시작부터 코믹하다. 엄숙한 '파란색' 제복에 정렬한 줄. 그리고 그 앞으로 어김없이 지나가는 '일반인'. 줄을 서 있을때 외에는 어떠한 질서도 거부하는 캐릭터들. 표정.. 처음으로 '말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을 본 느낌이다.
악단에는 개성강한 캐릭터가 세 명 있다. 첫 번째, 단장 '타우피끄'. 매우 엄격하며 융통성이 다소 결여된 사람이다. 그는 위의 장면들과 같은 '질서'를 부여한다. 가장 코믹한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교향곡을 작곡하는 '시몬'과 헌터 '칼리드'. (여기서 '헌터'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일이 틀어진 것도 칼리드의 'My Funny Valentine' 때문이다. 그래서 도착하게 된 곳이 바로 이곳.
악단은 식사를 위해 들어온다.
하룻밤을 지내면서 각각의 캐릭터들은 개성에 맞게 마을 주민들과 가까워진다. 타우피끄는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디나'와. 시몬은 소외받는 가장 '이칙'과. 칼리드는 여자 손도 못 잡아본 '파삐'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장면들은 영화의 재밌는 부분들이다. 직접 확인해 보시길.
하루가 지나고 이제 떠날 시간이다. 타우피끄다운 작별인사.
안녕~ ㅂㅂㅇ.
유쾌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이집트 악단 역할을 이스라엘 배우들이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집트에선 상영이 금지되는 안타까움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양국관계에 진전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