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1
1.
어제 오전 10시. 서울에 도착한 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결에 받아 옷걱정을 했더니 어떻게든 한다고 한다. 워낙 알아서 잘 하는 친구니 걱정하진 않았다. 5시 반. 사람을 만나고 강남에서 온 두리는 과연 간소한 티에 반바지를 사서 입고 있었다. 지오다노. '브이넥 숏슬리브 솔리드 티(10000원)' 두 장과 '코튼 트윌 플랫 프론트 버뮤다 반바지(28000원)'. 그 중 흰 티 한 장을 두고 갔다. 흰 티 한 장. 이건 중요한 문제다. 1)안쓰는 것을 주는 것과 2)마음먹고 베푸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뭐냐면, 기회가 있을 때 제 삶을 떼어 주는 것이다. 이 티 한 장은 그의 육신이다. 1)사정이 있어서 돈을 안 쓰는 것과 2)부탁하는데 망설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에 있다. 자기 의도에 따라 백 번 잘하더라도 '한 번' 사정이 생기면 안 돼. '한 번' 망설이면 안 돼. 그 한 번은 수만번의 실전 중에 유일한 선택이며,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 한 번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정말 원하는 것을 요청받았을 때 본심이 드러난다. 나는 그 역겨운 기만이 내 삶의 유일한 선택지임을 거부했고, 괴롭고 힘들지만 잘 버티고 있다. 이렇게 따져보면 상대가 원하는건 거의 없어. 줄게 없지. 주는 마음이 욕심이긴 하지만 잘 모아두었다가 타이밍에 맞춰 쏟아부으면 윈윈할 수 있어. 그게 내가 찾은 유일한 길이야. 그 '한 번'은 자신의 모든게 드러나는 한 번이야. 싫으면 꺼지자구. 싸움에 진 개처럼 도망치자고.
2.
필요해 할 때 쓸모있는가. 내 경험상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상황에 쓸모있기 위해서 반드시 유능하거나 부유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일 만을 알면 돼. 하지만 그러기 힘들지. 내 일과 계획이 있으므로. 이 지점에서 '과연 그러한가'를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하지 않기위해 지껄이고 꾸미는걸 피하고 있을 뿐이야. 근본적으로 하려고 들지 않지. 오직 생각하면서 '과연 그러한 것'들을 닫아가고 있다. 확실히 문제가 있어. 이상해.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내 운명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른건 바랄게 없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두려울게 없잖아. 따라서 나는 걱정도 없고 부담도 없고 그냥 편하게 잘자고 멋대로 살아. 그래서 어쩌다 한번씩은 쓸모가 있는거야. 그뿐이지만 그마저도 못하는게 두려워.
3.
밤 2시 두리는 내 방에 자러가고 ㅅ과 나는 ㅂ의 방에서 치맥, 진로와인. 4시 슬쩍 잠들어 8시쯤 나와 두리와 사우나 갔다가 아침 '돼지고기찌개' 작은거(8000원?)-두 명 먹기에 적당-피방갔다가 점심은 우리가 좋아하던 순대국. 2시에 두리를 배웅하고 ㅅ과 피방. 6시 ㅂ이 와서 함께 당구장. ㅅ은 8시쯤 가고 ㅂ과 나는 11시까지 5시간 동안 4구, 마지막 한 시간은 3구를 치며 오랜만에 집중상태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 이거지. 대신 이번 주는 지출 없다. 고삐를 풀고 달렸으니 이젠 내가 날 챙겨야 한다. 균형을 맞춰야지. 결과적으로 가족에게 심려끼치지 않도록.